L’Eclisse

  • On 2014. 01. 24

토마스에 두 번째로 설치될 작품의 제목이 정해졌다. 이클립스. 기뻤다.
자연스럽게 동명의 영화 얘기가 나왔다. 안토니오니의 영화 이클립스 또는 레클리스L’Eclisse. 그 제목을 들었을 때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집에 와서 찾아보니 보지 않은 영화라는 걸 알게 되었다. 라벤츄라L’Avventura와 라노테La Notte는 보았지만 이 영화는 빼먹었던 모양이다. 라벤츄라는 나의 명영화 리스트 중 하나이고 생각해보니 라노테의 한 장면은 그린 적도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던컨 하나는 블로우 업의 한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안 본 영화인데다가 기다리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기도해서 기대에 부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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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 보고 난 감상은 라벤츄라보다는 못하지만 더 강렬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 7분 정도의 엔딩 시퀀스다. 물론 오프닝 시퀀스도 인상적이었기에 이 영화는 강력함으로 수미쌍관을 이뤘다. 중간에는 엄청 지루한 순간도 있었다. 주식 시장에서의 아비규환. 견디기 힘들게 하는 게 의도였겠지만 그렇게 가학적인 게 싫었다. 의도는 알겠다고! 실제로 영화는 상당히 공격적이다. 엔딩 시퀀스도 마찬가지였지만, 훨씬 황당하면서 설득력이 있었다. 부재에 관한 것이었는데, 거의 착란을 일으켰다. 감독이 정말 반했구나 싶을 정도로 영화를 아름답게 수놓던 두 남녀 배우가 오늘 밤 만나자는 약속, 플롯을 남기고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황당하게 남겨진 이 기분. 생각 나는 정서 상태가 있었다. 낯익은 동시에 매우 낯선 순간. 데자뷰deja-vu와 쟈메뷰jamais-vu가 동시적으로 반복되는 상태이다. 이 반통찰적 anti-epiphany의 상태는 <광기와 모더니즘>이라는 책에서 루이스 사스라는 임상 심리학자가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상태이다. 모든 것이 더 똑똑하고 선명하게 보이는데 그 보이는 것의 내용이 없고, 소통할 실체가 없는 상태. 극단적인 소외의 상태. 착란의 상태. 이는 실제로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증상이라는 것이 그의 지적이었다.

반통찰적 상태, 이지적인 통찰이 불가능한 이 기이한 상태를 경험한 화가가 조르지오 디 키리코이다. (그는 튜린에서 실제로 이런 상태를 경험했다고 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디 키리코의 ‘시각’에 열광했다. 꿈 속에선가 언젠가 와본 적이 있는 듯한 광장이나 포르티코가 있는 건물 밖. 멀리 지나가는 기차. 우뚝 솟아있는 타워. 홀로 누워있는 아리아드네. 여기서 경험하는 것은 아찔한 낯설음이다. 이런 이상한 느낌은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데 그것은 어떤 종류의 초월을 닮아있다. 현실을 벗어나는 느낌. 하지만 성스러운 경험은 아니다. 기이하면서 인간적인 경험이다. 실제로 디 키리코는 이렇게 말했다. “햇빛 아래 걸어가는 사람의 그림자가 과거, 현재, 미래의 그 어떤 종교보다 더 불가사의하다.” 이건 분명히 ‘모던’한 발언이다. 그가 종종 니체를 언급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니체가 미쳐버린 곳도 튜린이었다.
Melancholia
모더니즘은 내러티브가 사라지는 순간이라 말할 수 있다. 형식에 집중한 추상도 그러하지만, 종교와 신화에 바탕을 둔 확고한 내러티브가 사라지고, 인간의 알 수 없는 내면과 관련한 ‘반이성적’ 내러티브가 등장했다. 특히 디 키리코의 1910년대 회화들은 ‘반통찰적’ 기운이 역력하다. 이미지는 지독하게 선명한데 그 내용은 알 수 없고 이제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듯한 먹먹한 정적이 그림을 가득 채운다. 내러티브가 있어야 하는 곳에 내러티브가 사라지는 섬찟한 순간이다. 실제로 내러티브가 압도하는 훌륭한 그림은 없다. 반면 모든 훌륭한 그림엔 내러티브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순간이 있다. 형태와 색과 붓질과 온도와 분위기…. 사람을 훅가게 하는 건 결국 그림 자체이다. ‘그림 자체’의 상태와 가까운 것이 이런 착란의 상태이다. 모든 것이 끊임없이 선명하게, 그 자체로 눈에 들어오면 미쳐버린다. 다행히도 우린 별로 보고 살지 않기에 미술가들이, 안토니오니와 같은 감독이 필요한 것이다.

안토니오니는 플로렌스에 실제로 일식을 촬영하러 갔다가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일식의 순간, 완벽한 어둠이 자아내는 정적은 이 세상 어떤 정적과도 비교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는 감정마저 사라지는 듯한 경험을 했다. 소실점이 보이는 텅 빈 거리, 이승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정적, 감정의 사라짐 그리고 내러티브의 사라짐… 디 키리코의 산문시 중 마치 이 영화의 엔딩을 묘사한 듯한 구절이 있다. “늦은 오후, 가로등이 하나 둘씩 켜지며 도시 동쪽에 있는 산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요새 뒤 절벽은 연자주빛으로 변하고 뭔가 모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간호사들이 광장의 벤치 위에서 수다를 떨고….” 안토니오니와 같은 지성이 디 키리코를 몰랐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 처한 인간의 조건, 소외와 단절에 천착했던 그는 디 키리코가 시작한 과업을 다른 미디엄을 통해 이어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인식도 감정도 사라지는 순간. 그 먹먹한 ‘의미 없는’ 응시의 순간. 우리가 경험할지도 모르는 그 아득한 순간. 두 이탈리아 남자들 덕분에 우리는 그 순간을 어쩌면 미학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이하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